
“앞치마 하셔야 해요.”
옆에 있던 통통하고 키가 작은 여자가 미수에게 앞치마를 내밀었다.
“안 가져 왔죠?”
“네, 고맙습니다.” 미수는 조심스럽게 앞치마를 받아 들었다. 분홍빛에 포크를 들은 돼지가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이 꼼꼼하게 바느질이 된 앞치마였다. 미수는 쉽게 입질 못하고, 앞치마를 이리저리 대보았다.
여자는 고구마튀김과 오징어튀김, 참치샐러드가 담겨있는 그릇을 옮겼고, 미수는 감자조림과 콩자반이 담겨있는 큰 그릇들을 수레에 올리기 시작했다.
“아, 김치는 어디 있어요?”
“김치는 없어요. 아이들이 잘 안 먹거든요. 오늘은 콩자반을 했네, 두부 치즈 롤을 하면 더 좋았을 텐데. 저기요, 우유랑 수저통하고 보리차 좀 챙겨 줄래요?”
여자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뻣뻣한 미수는 급식실에서 허둥지둥하고 있었다.
“아르바이트죠?”
여자가 식판을 정리하며 물었다.
“네?”
“아르바이트 하러 온 거 아니에요? 요즘 엄마들은 다들 바빠서 아르바이트 쓰거든요. 학교에서 오라니 안 갈 수도 없고, 돈을 내긴 하지만 마음이 불편하고, 이왕이면 아르바이트 쓰지 뭐 하면서요,”
“아니에요. 제가 메이 이모에요.”
“메이 이모에요?” 여자는 수레를 정리하다 말고 미수를 쳐다보았다. 미수는 여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메이 이모 맞아요.”
여자는 고무장갑을 벗더니,
“저는 우람이 엄마에요.” 라며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네, 안녕하세요.”
미수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여자는 더 묻지 않았다.

종이 울리자 교실 문을 열고 긴 파마머리의 여자 선생이 맨 먼저 나와 식판을 들고, 미수를 바라봤다. 미수는 다시 안녕하세요 라고 꾸벅 인사했다. 선생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미수 앞에 가만히 서있었다. 옆에 있던 우람이 엄마가 미수 앞으로 나오더니, 고생 많으세요. 죄송합니다. 하더니, 밥을 뜨고 국을 뜨고 반찬을 수북이 올려 주었다. 선생은 좀 덜어 주세요, 너무 많네요 하더니 다시 교실로 들어갔다. 우람이 엄마는 미수에게 귓속말로 아이들에게 차례로 밥과 국, 반찬을 올려줘야 한다고 속삭였다. 자신이 밥과 국을 올려줄 테니 반찬을 맡으라고 말했다. 미수는 얼굴이 빨개져 연신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작고 오밀조밀한 아이들은 미수 앞으로 와서 챙챙 소리가 나는 식판을 내밀었다. 오징어 튀김을 싫어하는 아이도 있었고, 밥을 한주먹도 안 되게 먹는 아이도 있었다. 국을 싫어하고 감자조림에 당근은 빼달라고 하는 아이도 있었다. 햄버거나 피자는 없냐고 묻는 아이도 있었고, 우유를 안 가져 가길래 미수가 우유 챙겨야지 했더니 버리라고도 했다. 그렇게 남겨진 찬 우유가 열다섯 개 정도 되었고, 예상은 했었지만 역시나 콩자반은 인기가 없었다. 배식이 끝나갈 무렵에도 콩자반은 여전히 그릇에 수북했다.
“언니!”
메이였다. 까만 눈과 곱슬머리가 집에서 볼 때 보다 더 사랑스러워 보였다. 또래에 비해 키가 큰 메이가 미수에게 식판을 내밀었다. 까만 손이 하얗게 터서 두툴두툴했다.
“조금 먹을 거야?”
“아니요. 저는 많이많이 주세요.”
미수는 얼굴이 환해져 반찬을 가득 담아 주었다.
“우유도 두 개 줄까? 안 가져가서 좀 많이 남았어.”
메이는 아니요 하더니 눈치를 봤다.
“메이 이모, 그건 그냥 집에 싸 가져가서 메이랑 먹어요. 학교에서 그럼 메이가 뭐가 돼.”
우람이 엄마가 한 마디 했다.
“언니가 바보네, 메이 미안. 친구들이랑 맛있게 먹어!”
“네!”
메이가 숟가락과 젓가락을 흔들었다.
“언제 봐도 참 밝아서 좋아. 공부도 잘한다던 데, 이모가 많이 도와주나 봐요?”
“아니에요. 메이가 알아서 잘 해요.”
“메이 엄마가 베트남으로 돌아갔다고 하던데, 맞아요?”
미수는 할 말이 없었다. 눈치를 보던 여자가 다시 물었다.
“할머니가 좀 편찮으시다던데, 괜찮아요?” 여자가 앞치마에 손을 찔러 꽂고 다리를 꼬아 복도 신발장에 몸을 기대며 물었다.
“네. 많이 좋아지셨어요.” 미수는 남은 반찬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날이 추워지면 그 일도 하기 힘들 텐데, 아직도 박스 모으러 다니시죠?”
“혹시 화장실 아세요?” 미수는 여자에게 상냥하게 물었다.
“저기...저쪽...복도 끝이에요.” 여자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화장실 쪽을 가리켰다. 미수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화장실로 걸어갔다. 노란 원피스가 사그락거렸다. 창에서 들어오는 한기가 발목을 감았다. 미수는 목까지 채운 단추 하나를 풀고 앞치마를 벗었다.
“이따가 청소해야 하니까 대걸레 하나 빨아 와요. 오늘 청소는 메이네 인거 알죠?” 멀리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큰 칠판 곁에 대형 텔레비전이 있고, 붉은 벽돌기둥에는 벽시계가 째각거리며 돌았다. 선생의 책상은 하얀 레이스가 달린 분홍색 천과 붉은 장미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교단에는 컴퓨터가 설치되어 있었고, 아이들의 사물함은 각자의 취향대로 이름표가 붙어있었다. 교실 뒤편에는 아이들의 그림과 종이 공작품, 접시에 그린 그림이 진열되어 있었다. 창가에는 아이들이 키우는 것 같은 새싹들이 보였다. 미수는 창을 열고 빗자루로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매끄러운 시멘트 바닥에 잘게 떨어진 색종이 조각들, 지우개 가루, 종이뭉치, 머리카락 몇 올이 빗자루에 쓸려나갔다. 대걸레로 바닥을 닦기 시작하자 햇살이 교실 깊숙한 곳까지 비춰들어 물기를 빠르게 말렸다. 대걸레질 후에는 걸레를 빨아 아이들의 책상을 하나하나 닦았다. 낙서하나 없는 깨끗한 책상이었다. 걸레가 두 번만 왔다 갔다 해도 반질거렸다. 30번 오메이. 미수는 걸레질을 멈추고 메이의 의자를 꺼내 책상 앞에 앉아보았다. 여기서 메이가 공부를 한다. 칠판이 잘 보일까? 미수는 칠판이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부를 했었다. 금발머리 파란 눈의 아이들 틈에서 미수는 너무 작고 약했다. 주근깨 가득한 앞니가 벌어진 금발 머리의 남자 아이는 매일 미수를 멍키쉣이라며 괴롭혔다. 미수는 학교만 가면 아팠다. 아프다고 엎드려 있기 일쑤였다. 미수가 칠판을 보고 수업을 하는 날은 손꼽아 며칠 되지 않았다. 교활하지 않은 아이들의 순수함은 너무나 솔직해서 더 아팠다. 미수는 그때, 말 한마디도 못하는 울보였다.
미수는 메이의 책상을 쓸어 보았다. 부드러운 햇볕이 손등을 적셨다. 책상 속에는 교과서 몇 권과 공책 두 권이 놓여 있었다. 미수는 메이의 교과서를 비닐포장지로 곱게 싸주었다. 공책 겉표지에 1학년 3반 30번 오메이라고 적어 주었다. 일주일에 두 번 메이의 숙제를 봐주러 오는 미수에게 할머니는 조심스럽게 급식 당번 얘기를 꺼냈다. 아파서 통 일을 못했더니 라면하나 살 돈을 벌지 못했다고 했다. 일을 해야 한다고, 미안하지만 선상님이 한 번 가주면 안 되겠냐고, 냄새나는 당신보다 선상님이 가면 메이도 더 좋아하지 않겠냐고, 염치가 없지만 도와달라고 했다. 툭툭하고 거친 손으로 미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메이 할머니의 낡은 스웨터가 삭아 바람에 부서졌다. 미수는 망설이지 않고 학교로 왔다. 담 너머에서 보던 것 보다 훨씬 크고 깔끔했다. 구름이 해를 걷어가고, 미수는 메이의 공책 겉장에 오메이 공주라고 다시 적어 넣었다. 미수는 교실을 빠져나와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 쪽으로 향했다.
“언니!” 멀리서 메이가 뛰어 오고 있었다. 미수는 메이를 향해 웃었다.
“왜 안 갔어?” 미수가 메이를 안아주며 말했다. 메이에게서 은은한 나무 향이 났다.
“언니랑 같이 가려구요.” 메이가 미수의 팔을 잡고 떨어질 줄 몰랐다.
“오래 기다렸겠네. 뭐 했어?”
“그냥 있었어요. 애들도 보고 하늘도 보고,” 메이의 작고 귀여운 입술이 아코디언처럼 움직였다.
“아, 참, 이거, 우유야. 냉장고에 넣어두고 할머니랑 먹어.” 미수가 가방에서 챙겨온 우유를 꺼내 메이의 가방 속에 넣어 주었다.
“무겁지? 언니가 들어 줄게.”
“아니에요.” 메이는 되려 미수의 가방을 빼앗았다.
“제가 들게요.” 메이의 사랑법에 미수가 짧게 한숨을 쉰다. 메이는 항상 곁에 있는 사람을 부끄럽게 했다. 자꾸만 안타깝게 했다. 미수는 메이가 너무 빨리 자라지 않았으면 했다.
“또 그런다. 언니가 밥을 더 많이 먹잖아. 이리 줘.”
“괜찮아요.”
“너 자꾸 그러면, 너 업고 언니가 집에 간다. 집에 가서 이렇게 확 내팽개쳐 버릴지도 몰라.” 미수는 메이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까르르 웃는 메이는 바람보다 가벼웠다.
대리석으로 된 벽걸이 수족관 안의 열대어가 조명이 껌벅거리자 연두색으로 변했다. 소파에서 보면 삼각형들의 작은 점들이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하는 것 같았다. 조명이 파란색으로 바뀌면 고급 레스토랑에 걸려 있는 그림처럼 한겨울 눈이 쌓여 있는 어느 마을을 물고기들이 떠다니는 것 같았다. 추위를 타지 않는 물고기들은 눈 위에서 몸을 비비고, 하얀 눈으로 덮여있는 것 같은 인공 산호초 사이를 들락거렸다. 정적이 흐르는 항로를 윤기 나는 열대어들이 무사통과하고 있었다. 욕심을 위해 생명이 다스려지고 있는 이곳은 아름답지만 하늘도 없고 땅도 없었다. 미수는 검은 대리석 기둥 속의 오차 없는 조명이 무서웠다.
“맨날 보는걸 뭐 그렇게 신기하게 쳐다봐. 뭘 좀 줄까?” 작은 꽃무늬 앞치마를 두른 아줌마가 물었다.
“아니에요. 아줌마 앞치마 예쁘네요.”
“그렇지? 역시 사장님이 보는 센스가 남다르셔서...”
“올라갈게요.” 미수는 황금빛 난간을 잡았다.
불을 켜도 방은 거북했다. 미수는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영어단어 시험지를 만들었다. 내일은 복지관 영어수업이 있는 날이다. 학생은 많지 않았지만 연령대가 다양해서 복지관 가는 일이 즐거웠다. 어린 꼬마도 나이 많은 할아버지도 모두 같은 단어를 배우고, 베껴 쓰기를 반복하며 어색하고 서투른 대화를 시작한다. 모두 땀을 흘리며 말을 하나씩 짚어 나간다. 짝을 지어 대화를 하면 삼십초도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진다. 말문이 막히면 웃고 만다. 쩔쩔매는 상대의 표정을 보고 아이도, 어른도 웃고 만다. 어쨌거나 거긴 웃음이 뱅뱅. 웃을 수 있다는 것이 쉽고 간단한 곳이었다. 타타닥 컴퓨터의 자판 소리 사이로 전화벨이 울렸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하이, 매쓰”
“누구세요?”
“나야. 매쓰.
“크리스?”
“생각하다니... 싫어.”
“크리스! 어디야? 한국 왔어?” 미수의 목소리가 커졌다.
“쩐쭈...야.”
“지난주에 왔다고? 왜 이제 연락해?”
“쩐쭈라고...버스타고 쩐쭈...”
“아 그래? 잘 됐어?” 미수는 크리스의 일을 짐작했다.
“아니. 그렇지만 괜찮아. 이번에 만나면 큰일 날 뻔 했어. 엄마한테 줄 선물을 깜박했거든.” 크리스가 헤헤거렸다. 크리스는 생후 100일이 지났을 때 미국으로 보내진 입양아였다. 스무 살 때부터 엄마를 찾아 다녔다. 다국적 자원봉사단체에서 활동을 하다가 만났는데, 미수를 처음 만났을 때 크리스는 굉장히 흥분 했었다. 단지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였다. 봉사하는 동안 미수에게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었다. 한국에 대해서 미수보다 더 잘 알고 있었고 헤어지는 날에는 ‘정’이 들었다며 당신을 만나지 못하면 ‘한’이 맺힐 거라고 미수를 놀라게 했다.
“뭐 좀 알아냈어?”
“아니, 기관에서 처음부터 기대하지 말라고 했었어. 그냥 지푸라기 잡는 거야.” 미수와 친한 탓도 있겠지만, 삼년 전 한국인 여자 친구를 사귀고 부터는 한국말이 부쩍 늘었다.
“지금 와?”
“아니 내일. 내일 봐. 스위티 매쓰.”
“미수라니까. un·suc·cess·ful”
“맞아. 오늘 크리스도 un·suc·cess·ful. 하지만 미수 때문에 해피. 바이.”
미수는 조금 웃었다. 방안 인터폰이 울었다.
“네 아줌마.”
“오늘 사장님 중국 가신 거 알지? 밥 언제 먹을 거야?”
“언제 오신대요?”
“엉? 난 잘 모르는데, 김 비서한테 전화해 볼까?”
“아니에요. 지금 내려갈게요.” 혹시라도 엄마와 겸상을 하게 될까 신경 쓰는 것 보다 혼자 먹는 게 편했다. 미수는 컴퓨터를 껐다.

나무가 주는 풍경이 사라진 초겨울은 사람들의 종종걸음과 입김으로 채워졌다. 화려하고 따뜻한 불빛들이 해가 떨어지자마자 불을 밝혔다. 찜통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는 호빵이 슈퍼 앞에 나오고, 각종 풀빵들이 각기 다른 이름으로 포장마차 속에서 익어갔다.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고, 나무에는 떨어진 나뭇잎 대신 작은 전구가 걸렸다. 겨울은 낮보다 밤이 더 사랑스러웠다. 메이와 약속한 시간이 조금 지나 있었다. 미수의 손에는 메이가 좋아하는 귤이 한 봉지 들려 있었다. 걸음을 재촉하자 골목 어귀부터 환한 불빛이 보였다. 메이의 집 근처였다. 무슨 일이지? 가로등도 잘 켜지지 않는 동네에서 대낮처럼 환해야 할 일은 드물었다. 익숙한 자동차 번호였다. 양복 차림의 남자들 사이에서 짧게 머리를 자른 여자가 보라색 숄을 두르고 서 있었다. 선영이 메이의 할머니에게 자주색의 스웨터를 대자 사진기의 플래시가 터졌다. 할머니는 어색한지 차렷 자세로 움직이지 않았고, 메이는 광 앞에서 뒷짐을 쥐고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메이 곁으로 높게 쌓인 연탄과 20kg 쌀 포대 몇 개가 보였다. 선영은 할머니의 두 손을 꼭 잡은 채 눈을 맞춰가며 뭐라고 중얼거렸고, 고개 숙인 할머니의 입김이 하늘로 올랐다. 메이는 쌀 포대 곁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그때였다. 연탄재가 선영을 향해 날아들더니 마루 위에서 퍽 하고 깨졌다. 주위에 있던 양복들은 빠르게 선영의 앞을 막아섰고 진원지를 찾았다. 나쁜 년,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돌아보니, 솜바지를 입고 누빈 다운점퍼를 입은 중년 여자였다.
너 지옥 간다 나쁜 년, 내 남편 살려내라 죽일 년. 여자는 계속 소리쳤고, 양복들에게 빠르게 제압당했다. 선영은 메이 할머니에게 사과하며 다치지 않았냐고 걱정했다. 아니 걱정하는 척했다. 양복들이 여자를 끌어내자 시야가 넓어졌고, 선영은 엉거주춤 서 있던 미수와 눈이 마주쳤다. 흔들리지 않았다. 흔들리면 선영이 아니었다. 단 한 번도 빈 곳을 허락하지 않는 짐승의 눈이었다. 선영은 고개를 돌려 할머니의 등을 두드리고, 쭈그리고 앉아 있던 메이의 손을 잡아 자신 앞에 세웠다. 다시 사진기의 플래시가 터졌다. 됐으면 가죠, 선영은 짧게 말했다. 메이의 할머니는 뒤돌아가는 선영을 잡아 곶감 하나를 빼서 선영에게 내 밀었다. 선영은 할머니께 사온 선물이니 혼자 다 드시는 게 맞다고 할머니께서 다 드셔야 마음이 편하겠다고 했다. ‘그게 아니지. 안 그래 엄마?’ 미수는 숨을 쉬었다. ‘엄마는 그런 거 안 먹지, 맨날 집에 와서 토하잖아. 불결하다는 이유로...’ 선영이 다시 돌아섰다. 사진을 찍던 사람 중에 한명이 사장님께서 여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그림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선영은 메이를 빠르고 짧게 훑어보더니 흔쾌히 그러마했다. ‘오늘은 물티슈 챙겨왔나 보네.’ 미수는 입술을 꽉 붙였다. 선영은 미수를 지나쳐 양복들을 거느리고 차에 탔다. 차 안에서 메이의 머리를 쓰다듬은 손을 닦느라 물티슈를 몇 통이나 쓰고 있을 꺼다. 대낮보다 밝아진 골목을 비대한 차가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갔다. “언니!” 메이가 뛰어 왔다. “손님들이 많이 왔네. 할머니 죄송해요 조금 늦었어요.” 할머니는 쌀 포대를 옮기느라 거친 숨을 토하고 있었다. “제가 할게요. 저쪽으로 옮기면 되죠?” 메이가 돕겠다고 쌀 포대를 안았다. “놔둬. 언니가 다 할게,” “제가 할게요.” 하던 메이는 결국 쌀 포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미수의 품으로 쓰러졌다. “언니한테서 아까 온 아줌마 냄새 나요.” 미수에게 안긴 메이가 말했다. 미수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럼 안 되는데...’ 미수는 찬물로 손을 씻고 싶었다.
“왜 이제와, 사장님 들어오셨어.” 현관에서 아줌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미수를 맞았다.
“일이 있었어요. 올라갈게요.”
“인사 안하고?”
“받지도 않을 텐데요 뭐.”
“밥은?”
“제가 차려먹을게요. 걱정 말고 쉬세요. 고마워요 아줌마.” 미수는 방으로 올라가는 걸음이 무거웠다. 아까 봤던 선영의 눈빛이 떠올랐다. 오래 봤지만 결코 익숙해 질 수 없는 눈빛이었다. 잘게 깨진 유리파편들이 박혀 있는 눈빛. 온기가 뽑혀진 눈빛. 폭풍과 어둠이 말라붙어 모든 그림자를 삼킨 듯한, 알 수 없는 눈빛. 세수를 마친 미수는 눈을 문질렀다. 옷을 갈아입고 식당으로 들어섰다. 선영이 밥을 먹고 있었다. 미수는 다시 방으로 올라가려고 돌아섰다.
“밥 떴는데....” 아줌마가 밥그릇을 식탁위에 올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미수는 천천히 식탁 앞으로 걸어가 의자를 빼고 앉았다. 선영은 미수가 앉자마자 일어서 나가버렸다.
“다 드시지...” 선영의 앞에 놓여 있던 식지 않은 밥과 국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뜬 채 그대로였다.
“글쎄. 안된다니까.”
“너무하네. 좀 보자.”
“크리스, 이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야. 메이의 의견도 중요해.”
“매쓰, 사람이 사람을 보고 싶어 하는 데 뭐가 문제야? 나도 가자.”
크리스는 계속 메이를 보고 싶다며, 수업에 따라오겠다고 했다.
“거긴 내 일터야. 메이에게 네 이야기를 한 적도 없고.”
“오늘 가서 내가 할게. 공부에 방해 안 되게 가만히 있을게.”
“크리스, 미안하지만 내가 적당한 자리를 만들 테니까 오늘은 양보해. 메이가 사람을 좀 가려.”
“여자들은 다 나를 좋아해. 나는 꼬마 숙녀를 좋아하고, 꼬마 숙녀도 나를 좋아해.”
“기가 차네. 그런 생각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거니?”
“거울 보면 할 수 있지. 매쓰. 가자.”
크리스는 계속 졸랐다. 결국 메이의 집으로 가 사정이 생겼다면서, 오늘은 셋이 공부를 같이 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더니, 메이가 미수의 눈치를 살폈다.
“네 마음대로 해. 불편하면 가라고 할게.”
메이와 크리스는 나란히 앉아서 수업을 받았다. 쓰기와 읽기, 말하기 모두 메이가 크리스보다 잘했다. 크리스는 머릿속에 넣어 뒀던 한국말이 자꾸 도망을 간다며, 원래는 자신이 메이보다 훨씬 많이 잘한다고 했다. 크리스가 장난을 쳐도 메이는 잘 웃지 않았다. 쓰다 달다 한마디 말도 없이 크리스가 읽고 쓰는 걸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문 좀 열어도 되나?”
메이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메이가 일어서 문을 열었다. 할머니의 손에는 냄비와 그릇, 김치가 들려 있었다.
“라면을 좀 삶았어. 먹고 해. 서양 총각은 이런 거 좋아하지? 밀가리 음식?”
“오우, 예.” 크리스는 그릇에 덜어 달라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미수가 넉넉하게 메이에게 라면을 담아 주었다. 크리스에게도 주고 자신의 그릇에도 라면을 담았다. 크리스는 먹는 내내 맛있다는 말을 연발했으며 메이도 부지런히 먹었다. 그릇을 비운 메이가 냄비 안에 있는 라면을 국자로 크게 떠서 크리스에게 덜어 주었다. “오빠 다 먹어요.” 메이가 작게 말했다. 크리스가 “오빠 잘생겼지?” 했다. 메이가 “네. tv에 나오는 사람 같아요.” 했다. 크리스가 메이에게 찡끗하고 윙크를 했다. 메이의 얼굴이 빨개지더니 얼른 고개를 숙였다. 미수는 메이를 곁으로 앉히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조만간 동물의 왕국에 나올 것 같지? 야생 타조로.” 라고 속삭였다. 메이가 웃었다. 이상한 기계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라면을 먹던 크리스가 전화를 받았다.
“네? 어디라고요?” 크리스가 젓가락을 놓고 휴대전화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메이와 미수도 크리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크리스의 눈이 커지더니 종이에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전화번호는 없어요?” 라고 물었고, 크리스는 또 받아 적기 시작했다. 전화를 끊은 크리스 표정이 어두워졌다.
“엄마에 관한 전화야?”
“응. 엄마를 알지도 모르는 분이래.”
“확실한 게 아니네.”
“그래도 갈 거야. 메이, 매쓰 같이 가자.”
“난 안돼. 메이 수업도 봐줘야 하고 복지관에도 들려봐야 해.”
“메이 수업은 거기 가서 하자. 야외학습 그거 하자. 나 혼자 어떻게 가, 한국말도 잘 모르는데...”
“혼자 잘 다니잖아. 새삼스레 왜?”
“같이 가자. 매쓰. 메이? 어때? 차타고 붕. 엄마가 있는 데 붕 가는 거야.”
메이는 “엄마...?”라고 말하며 미수를 바라봤다. “응.. 엄마” 미수는 메이의 손을 잡았다.
현관에는 낯선 구두들이 놓여 있었다. 사람들의 박수소리와 목소리가 두런두런 들리는 걸로 보아, 선영의 손님이었다. 선영의 회사가 확장을 위해 달동네 철거를 강행했었다. 그 과정에서 다친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철거를 막아보겠다고 분신을 택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선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집에 들어와 밥을 먹고 잠을 잤다. 결국 선영의 뜻대로 됐지만 회사의 이미지의 타격은 피해갈 수 없었다. 그 뒤로는 집으로 기자들이 찾아오는 날들이 많아졌다. 미수는 조용히 피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대리석 기둥에 가려지게 걸어서 이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이제 오니?” 선영이 미수를 불렀다. 사람들의 시선이 계단 앞에 서 있는 미수에게 쏠렸다. 미수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계단으로 올라가려는데 선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 지난번에 네가 얘기한 복지사업에 대한 얘기, 자료 좀 보여 줄 수 있겠니?”
“복지사업이요?” 열심히 뭔가를 적던 기자가 선영에게 물었다.
“아, 쓰지 마세요. 아직 입 밖으로 낼 단계는 아니구요. 쟤가 제 자리를 대신해서 그늘을 찾아다니고 있죠,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봉사활동은 물론이구요, 힘들고 어려운 분들 위해서 여기 저기 뛰어다니는 친구죠. 저를 위하는 마음이 아주 깊어서 제가 보고 배울 때가 아주 많답니다.”
미수는 뒷목이 뻐근했다. 주먹을 쥐었다. 왜 저런 말을 흘리는지 미수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이미지를 회복을 위한 계산된 거짓말, 속이 뒤틀리고 역겨웠다.
“사장님도 좋은 일 많이 하시는데, 따님이 사장님을 많이 닮으셨네요. 집안 내력인가 봅니다.”
“그게 뭐 내력이라고 되는 건가요? 본인의 마음 아니겠어요? 나누고 돕고 서로 공유하고 모두 그런 마음이라면, 그런 게 당연한 일이 된다면 지금 세상의 눈물이 반은 줄어들지 않겠어요? 사랑을 하는 법을 알려주면 다음 세대는 훨씬 더 따뜻해질 텐데...세상을 바꾸는 것도 결국은 사랑 아니겠어요?”
“역시 사장님. 언제나 주옥같은 말씀뿐이십니다.” 기자는 어깨를 들썩거렸다.
“따님과 사진 한 장 같이 찍는 거 어떠세요?”
“아니에요. 저 하나 유명세를 치르는 걸로 됐어요. 저 애는 그냥 사람들 속에서 평범하게 섞여 살면서 삶의 진솔함과 진정성을 배워가며 살게 하고 싶어요.”
“그래도, 한 장만 어떻게....”
“사진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정말 중요한 건 마음이죠. 진실된 마음은 결국 모두에게 알려질 거에요. 애써 드러낼 필요 없습니다. 올라가거라.”
선영은 고개를 돌려 미수에게 눈짓을 했다.
미수는 방으로 돌아와 간단하게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크리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크리스, 거기...지금 가면 안 될까?”

해가 나자 전깃줄에 매달린 아침나절의 비가 널어놓은 빗방울들이 반짝거렸다. 전깃줄을 철봉 삼아 오래 곁에 있어 달라고 격려하는 물방울들은 바람에게도 쉽게 밀리지 않았다. 뻣뻣한 땅에 비가 스며들어 푹신거렸다. 서로에게 몸을 돌려 깍지를 끼고 있는 듯한 숲을 지나자 마을이 열렸다. 누군가 아무리 기웃거려도 무안하지 않게 해줄 것 같은 마을은, 시린 공기와 앙상한 나뭇가지, 초겨울의 낯익은 풍경들 틈바구니 속에서 계절을 준수하며 자신의 몸을 덥힐 화로를 마련하고 있었다. 쌓인 나무 장작은 찬바람이 울어도 단단했으며, 집집마다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가 몸을 뒤채며 마을로, 마을로 퍼져 쨍쨍 거리며 우는 풍경을 달랬다. 셋은 손을 잡고 나란히 걸었다.
속절없이 이리저리 부대끼는 배회를 당겨 자신의 무릎에 앉혀 주는 마을은 처음이었다. 분명 세월이 지나간 곳이었다. 분명 그럴 텐데, 세월이 긁은 손톱자국이나 눈물 얼룩이나 세월의 상처는 닦여졌다기보다 사라져있었다. 무엇이 자라 그것들을 삼켜 꽃으로 피워냈을까?
마을의 집들이 골목이 조금씩 개안할 때마다 안타까웠다. 눈 속에 들어 올 때 마다 미어졌다. 마을에 젖은 셋은 쉬이 걷지 못했다. 눈 속에 심어 놓을 수 없음이, 곧 잊고야 마는 인간의 그러한 속성을 나무라는 듯. 마을은 셋의 걸음을 바람으로 감았다.
“여기 한 번 들어가 볼까?” 코가 빨개진 크리스가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손을 꺼내 가리킨 곳은 호은종택이었다. 위엄 있는 집이었다. 처마가 단정했으며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은은한 마치 하얀 모시 한복을 보는 듯, 셋은 모두 말을 잃고 솟을 대문을 지나 ㅁ자형집으로 들어갔다. 대문채와 정침으로 나뉜 집은 크고 작은 문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나뭇결이 살아 있고 손으로 쓸어 보면 거칠고 딱딱한 것이 처음 집이 완성됐을 때의 찬바람 속에서 가족을 안아주겠다는 결의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대들보의 어디 방문의 어디 마루의 어디 그 속에서 세월을 훔치고 있는 듯 했다. 세월이 이기지 못한 생기였다.
“저곳 좀 봐.” 크리스가 대문 앞에서 소리 쳤다. 어느 쪽에서 봐도 똑바르다는 문필봉이었다. 뾰족하고 반듯했다.
“이 집에서 아주 유명한 시인이 태어났어. 지조 있고 풍류 있는 시인이고 학자였는데, 재물을 빌리지 않고 사람을 빌리지 않고 문장을 빌리지 않는 게 가훈이었대.” 미수는 중얼거리듯 크리스에게 말했다.
“대문채에서라도 살아 봤으면 좋겠다.” 크리스가 웃었다. 크리스가 웃고 메이가 콜록거렸다.
“많이 춥네.” 미수는 장갑을 꺼내 메이에게 주고, 목도리를 풀러 메이의 목에 둘러 주었다. 점퍼의 모자를 메이에게 씌우고 단단하게 묶었다. 메이가 작은 눈사람 같아졌다. 셋은 좀 더 걸었다. 담장 안에서 사람들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크지 않은 마을이었지만 집들 뒤로 혹은 집 사이로 난 골목이 여유를 만들었고, 비슷한 모양의 기와와 돌담장 탓에 꽤 규모가 있는 듯 느껴졌다. 바람이 갈 길을 잃은 것인지 마을을 지나가지 못하고 계속 자리에서 맴돌아 사람들을 붙잡았다.
“저기 저 집 같아. 잠깐 다녀올게.” 크리스가 대문 없는 집을 가리켰다.
“같이 가.” 미수는 크리스에게 따라 붙었다.
“혼자 다녀올게. 저기 올라가있어. 예쁜 계단 위에서 놀고 있어.” 크리스는 눈을 찡긋하더니 둘의 등을 밀고 뛰어갔다.
미수는 메이의 손을 잡고 돌계단을 올랐다. 37개의 계단을 지나 정자 앞에 섰다. 삐이익 대문이 열렸다. 창주 정사에서는 문필봉과 연적봉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마을 전체가 다 내려다 보였다. 햇살이 마을의 왼쪽에서 접혀 오른쪽으로 펴졌다. 마을이 음지와 양지를 바꾸었다. 볼수록 신기한 마을이었다.
“크리스 오빠다.” 마루 위에서 뱅글뱅글 돌던 메이가 바람에 찌그러진 입을 겨우 펴서 말했다. 까만 머리의 크리스는 연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슨 얘기가 오고 가는 걸까? 손을 앞으로 모은 주인과 크리스는 무슨 얘길 하고 있을까? 제대로 알아듣고 있을까? 엄마를 찾았을까? 크리스가 허리를 숙이고 인사를 하자 앞에 있던 주인이 크리스의 등을 두드렸다. 크리스가 뒤로 돌아 창주정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크리스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메이. 이리 와. 오빠한테 가자.” 미수는 메이를 안아 마루에서 내렸다.
크리스는 창주 정사로 오는가 싶더니, 옥천종택으로 쑥 들어갔다. 옥천종택의 초당의 지붕은 짚으로 이어져있었다. 어찌나 소박하게 웃고 있는지 초당 앞에 서면 같이 입 꼬리가 귀에 걸려 실실 웃음이 났다. 검댕을 묻힌 아궁이의 코가 새까맣게 귀여웠다.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바람이 잦아들었다. 안과 밖에 확연히 달랐다. 대문 밖의 바람은 처음 마을에 도착했을 때 보다 사나워져 나무들의 머리채를 쥐고 흔들고, 나뭇잎들의 광란을 도왔다. 솔잎들이 바람 속에서 부서졌으며 가끔씩 두런거리며 들리던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도 바람을 피해 꽁꽁 숨어버렸다. 바람은 꺽꺽 대며 울었다. 무엇도 허락하지 않는 맹렬한 기세로 울음소리를 멀리 보냈다.
“여기서 글을 배웠나 봐.” 담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크리스의 검은 머리가 한쪽으로 쏠려 눈을 가렸다.
“저기...크리스.” 미수가 크리스에게 다가갔다. 괜찮은지 물어보고 싶었다.
“언니, 언니. 여기. 빨리요.” 메이의 목소리가 동동거렸다. 둘은 정침 안으로 들어갔다. ㅁ자형 뜰집에 들어서자 바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짐승 같은 울음소리도 멈췄다. 한집이었지만 대문 안 그리고 정침 안이 또 달랐다. 이쪽과 저쪽 너무나도 다른, 순결하고 힘 있는 고요에 바람이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박공지붕 사이로 네모난 하늘이 펼쳐졌다. 처마를 따라 흘러내린 햇볕이 마당에 고였다. 셋은 햇볕 한 줌으로 몸을 녹였다.
“엄마가 이런데서 살고 있으면 좋겠다.” 작고 가벼운 한숨이 크리스의 입에서 흘렀다.
“엄마 알고 계신대?”
“그 분이 알고 계신 분은 엄마가 아닌 것 같아.”
“자세히 물어 봤어?”
“응.”
크리스 보다 미수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메이가 미수의 눈치를 살폈다. 크리스는 미수의 어깨에 자신의 팔을 올리고, 미수를 꽉 끌어 앉았다.
“하지만 괜찮아. 스위티, 다음이란 게 있잖아.”
“으응.” 미수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또 전화가 올 거야 분명히. 엄마도 날 찾고 계실 테니까...그래서 만나는 동안 외롭지 말라고, 친구들을 만들어 주고 있어. 그렇지 메이?”
메이는 활짝 웃으며, 미수 곁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셋이 앉아 있는 마루의 살갗이 포근했다.
“크리스, 번번이 실망하면서 엄마를 왜 찾아. 지금 부모님도 따뜻하잖아”
“매쓰 너는 엄마가 있으니까 잘 모르겠지. 엄마를 찾는 건 본능 같은 거야. 엄마가 없으면 항상 마음이 비어있는 것 같잖아.”
“맞아, 그래서 나도 늘 엄마가 그리우니까.”
“너도 그리워?” 크리스는 미수에게 물었다.
“응. 엄마 같은 엄마가 그리워.”
“두 사람 너무 닮은 것 같아. 왜 다가가지 않지?”
“타협한거야. 우리는 서로 상처 주지 않는 선에서 각자 살기로 했어. 엄마는 자신 말고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 미수는 크리스의 팔을 풀었다.
“그럼 네가 엄마를 가야금해야지.” 크리스가 안쓰러운 눈빛을 보냈다.
“가여워해야지.” 미수가 고쳐주었다.
“헤헤헤 그래도 알아들었네.” 크리스가 미수를 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럼, 우리 가까우니까.” 미수가 크리스 쪽으로 몸을 더 붙였다.
“우린 모두 엄마가 필요하구나. 이렇게 꽉 안아줄?” 크리스는 미수와 어깨동무를 하더니 마루 위로 누웠다. 미수도 쓰러지고 덩달아 메이도 기우뚱하더니 마루 위에 등을 댔다. 셋은 나란히 누워 하늘을 바라 보았다.
“그럼, 저기에도 우리 소원이 접수 됐겠다. 가까우니까...” 크리스가 하늘을 향해 손짓을 했다. 네모난 하늘이 낮게 내려와 있었다.
“눈이 올까?” 미수가 중얼 거렸다.
“아니. 아직은 아니야. 분명 크리스마스 때 눈이 올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요?” 메이가 눈을 깜박 거렸다.
“눈송이로 가장자리를 덮어주시니까. 같이 웃고 싶어서 크리스마스를 벼르고 계셔. 틀림없어. 날 믿어보라구.” 크리스는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을 쳤다.
삐걱 거리는 대문의 소리가 바람의 은둔으로 희미해졌다. 크리스마스라...모두에게 행복한 크리스마스가 눈송이로 떨어져 머리 위에서 녹으면, 계절은 홍조를 띤 볼을 사람들에게 부비며, 노래를 부를 것이고, 노래 속에서 불을 당긴 촛불은 음지를 밝히고, 언 손을 녹일 수 있도록, 오래 자신의 몸을 태워 줄 것이다. 셋은 기다리고 있었다. 메이. 크리스. 미수. 메리 크리스마스. 겨울이 속삭이자, 기다림이 따뜻했다.